(역문): 공의 휘는 원길(元吉)이요 자는 성중이며, 혹 태초 라고도 하고,호는 농은(農隱)인데, 고려조 공민왕 18년 기유년에 진사로 문과을 과에 오르니 곧 대명홍무 2년이었다. 고관을 역임하여 검교문하시중에 이르러 홍무22년 기사년에 정포은 몽주와 설예정 장수 등으로 더불어 계책을 의논하고 정창군요를 세우니 이분이 공양왕이 되었다.
따라서 1등훈에 책정되어 추중분의 익재필성 극복 공신호를 주고, 3중 대광보국 광록대부 옥천부원군 겸 전공판서를 봉하였으며 충헌(忠 獻)이라 시호를 하사하셨다. 공이 그때 일이 어찌할 수 없음을 판단하고 고향인 순창에 물러가 살며 스스로 농은이라 칭하고 안정할 뜻을 보이니 그때 사람이 마침내 포은,목은,도은,야은과 함께 5은이라 칭송하였다.
일찍이 포은에게 실르 지어주기를 귀가 병들어 세상 일을 잘 듣지 못하니 내에 가득한 밝은달에 도롱이 입은 한사람 이더라, 목은 이 시를 보내어 복을 넓힌 종소리가 아직 울리지 아니하니 이불을 끌어안고 무릅꿀어 앉아 찬 밤을 지내다 내 한몸은 쇠쇠하고 병들었는데하늘과 땅은 늙었고 일만사는 성하게 버려Tssmep 날과 달만 밝았네!. 저구의 사귐을 옮겨 옛주인을 기리고 화봉땅 사람같이 국운을 잊지 아니 하였다. 길고 긴 고금에 무궁한 일이 수심을 일으켜 마음이 편하지 않다.경오년 8월에 별세하여 다음에 신미년 정월에 순창군 동촌오산 금굴리 향남 지원에 장사하고 옛적에 비석이 있었는데 이조가 창업하므로 묘전에 묻었다 하니 대개 기휘한 바가 있기 때문이다.